조상 제사는 우리 전통이 아니다
‘제사’하면 흔히 유교를 만든 공자를 떠올리지만, 사실은 공자가 태어나기 8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중국 황하 유역에는 200여개가 넘는 부족들이 살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력한 부족이 우리의 조상 동이족이었다. 동이족에게 패한 상족이 중국내륙으로 이동하여 은나라를 세운다.
은나라의 반경왕은 미신을 대단히 신봉했고 그의 아들 무정 역시 황하신, 산신, 조상신, 천신 등 온갖 잡신에게 날이면 날마다 제사를 지내곤 했다. 무정이 죽었을 때 장자 조강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는데, 사실 동생인 조갑이 훨씬 더 똑똑했다. 결국 조갑이 쿠데타로 형을 죽이고 왕이 되면서 제일 먼저 한 것이 제사문화의 정비였다. 잡신에게 드리던 제사를 폐지하고 오직 조상에게만 제사하게 했다. 잡신들을 섬기는 다른 부족보다 조상신을 섬기는 자신이 가장 탁월한 혈통이라는 것이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자신의 정치적 위상을 강화하기 위한 전략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제사의 시작이다. 이것을 후일에 정치가인 공자가 체계화한다.
쿠데타 후의 정통성 세우려는 노력은 우리나라에도 있었다. 조선의 이성계는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고 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웠지만 민심을 장악하지는 못했다. 정도전의 제안대로 불교를 배척하고 절대왕권을 지지하는 유교를 도입하며, 한양 천도까지 하는 등 정통성을 세우려고 부단히 애를 썼다. 그러던 중 무학대사에게 조언을 구했을 때 무학대사는 민심은 무력으로 안 되고 하나의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효도가 극심한 민족이니 민심을 돌이키기 위해서 조상 제사를 많이 지내고, 간접적인 방법으로는 나라에 임금이 둘 일수 없다 하여 씨가 하나인 대추를, 삼정승(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상징하는 밤과 육판서를 상징하는 씨가 여섯인 감을 놓고 제사를 지내며 떠받들어 모시게 하라고 했던 것이다. 그것이 세월이 흘러 마치 우리의 고유한 전통 문화인 냥 둔갑해버린 것이다.
살아계신 부모님이 더 중요하다
조상제사는 중국의 못된 왕이 자신의 치부를 감추기 위해 시작한 것이며 우리 고유의 전통도 아니다. 더구나 조선시대는 평민, 상민은 흉내라도 내면 곤장을 맞아야 할 정도로 양반들만 독점했던 문화였다. 일제 강점 이후에야 차별의 서러움을 겪었던 평민들이 양반 흉내를 내느라 따라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무지몽매한 백성들은 조상제사가 마치 효(孝)인 양, 그것을 하지 않으면 불효인 양 세뇌되어 버렸다. 사실 조상제사의 원조인 중국에선 혁명기를 거치면서 다 없애서 이제는 아들 딸 막론하고 형편이 되는 자식이 1년, 길어야 3년을 지내고 끝낸다.
돌아가신 부모에게 제사하는 것은 절대 효나 불효의 판단 근거가 될 수 없다. 제사 때가되면 살아생전 부모님께 해드리지도 않던 진귀한 음식들을 제사상에 올려놓고 드시라 한다. 돌아가신 뒤에 상다리가 휘게 차릴 정성으로 살아계신 부모님께 보약 한 첩 지어드림이 진정한 효도일 것이다.
"너는 네 아비와 네 어미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게 준 땅위에서 네 날들이 길 것이라"(출20:12)